사위어가는 장미꽃과 초롱꽃을 보내자 격정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부쩍 비오는 날이 많아진 날씨 때문인지 풀과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있다. 신대방삼거리역 인근의 자이아파트단지도 마치 비를 먹고 자라는 숲속의 아름드리나무들처럼 어느새 쓱 완공되어가니 신기하기만 하다.
건물을 살펴보면 그 속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엔 매우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진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보수를 하다하다 안되면 다시 건물을 지어야 한다. 
관계에서 만남이 시작될 때는 서로의 장점을 보며 끌리지만 점차 가까워질수록 무의식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며 갈등이 생기고 극복하지 못하면 헤어지게 된다.
훌륭한 건물일수록 오래도록 세월의 무게를 잘 견뎌내듯이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고 견고하게 자리를 잡는 관계도 있다.
세계영화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시기 누벨바그의 어머니라 불리는 아녜스 바르다(1928~2019)와 사진작가 JR의 경우가 그렇다. 바르다는 처음에 사진작가로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30세에는 이미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인정받고 있었고, 단편영화·에세이영화·극영화·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40여 편의 아름답고 혁신적인 영화들을 제작했으며, 권위 있는 국제영화상들을 수상한 프랑스 영화 거장이다.
다큐멘터리영화라 할지라도 그 속에 시적인 요소들과 미학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았고, 일흔 살이 넘었을 때 시각예술가로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노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증거로서의 영화를 만들고, 심지어는 남편이나 자신의 죽음마저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화화하는 등 끊임없이 창조적인 예술의 혼을 살렸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물결 따라 밀려오는 해초의 여정을 닮았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녀의 뛰어난 업적도 그러하지만 필자의 마음에 가장 와닿는 것은 바르다가 마지막까지 젊은 예술가와 함께 영화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진작가 JR과는 55세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바르다가 90세에 삶을 마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예술적 동지로서 함께 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걷기 힘든 바르다의 눈과 발이 되어 준 JR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시간이나 나이에 제한받지 않고 열정적으로 예술에 매진할 수 있었던 둘의 내면의 힘이 존경스럽다.
바르다가 여든 살의 나이에 자신이 사랑한 장소인 해변을 배경으로 촬영한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 남다른 케미의 바르다와 JR이 포토트럭을 타고 프랑스를 여행하며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삶을 카메라에 담아 즉흥 갤러리로 만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사람들(2017)>, 그리고 65년 동안 연출했던 작품을 자신이 직접 설명하며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기쁨과 행복에 대해 전하는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라는 영화를 찾아서 보고 싶다. 
시간의 차원을 넘어 황혼이 지기까지 삶의 가치를 공유하고 실현하며 진실 되게 동행하는 관계를 ‘소울 메이트’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여 공간의 차원까지 넘어 서로 멀리 떨어져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별과 같이 남아있을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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