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여름의 절정 ‘7말 8초’가 시작되었다. 바깥에서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우리 집 거실엔 허수아비 병정이 서 있는 것 같다. 웬만하면 부채와 선풍기, 그리고 샤워로 버티기 때문이다.
‘여름’ 하면 잊을 수 없는 어릴 적 시골에서의 추억은 ‘등목’과 ‘수박’이다. 아버지께서 한차례 논에 갔다 오시면 땀이 범벅이 되어 오시는데 웃옷을 벗고 엎드려 “막내딸~ 등목 좀 해줘~” 하셨다.
마중물을 부어 길어 올린 시원한 샘물을 주황색 바가지로 쭉쭉 뿌려드리면 “아이구 시원해~ 아이구 시원해~”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과일의 황제같이 크고 맛있는 수박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절반으로 자르기 위해 가운데에 칼끝을 대면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빨간 속살을 보여주던 그 환희의 순간을 어찌 잊으랴. 수저로 뚝뚝 떼어서 먹다가 통째로 들고 달콤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달콤한 화채를 만들어 먹고 난 후엔 수박 껍데기로 군인모자처럼 쓰고 병정놀이를 즐기곤 했던 추억이 아련하다.
고마운 이웃에게 마음을 전하는 데 더없이 좋은 과일 또한 수박이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매우 풍성해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빌라 4층 공용 베란다의 힘든 방수작업을 전적으로 맡아서 했던 윗층 아저씨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냥 있을 수 없어 수박을 선물했는데 내가 먹은 것보다도 훨씬 행복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수고하시는 그 분을 향해 “우리들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하고 크게 외쳐본다.
한편,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다 보면 ‘커피 칸타타’가 가끔 흘러나오는데 특이하고 재미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작곡한 곡으로 커피를 즐겨마시던 시대의 풍습을 담고 있다. ‘칸타타’란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작은 규모 관현악 반주에 해설과 아리아가 있는 성악곡이다. 바흐가 작곡한 칸타타는 200곡이 넘는데 종교적인 칸타타가 주를 이루고, 이 곡은 흥미로운 일상이나 시대적인 풍자를 담아 서민들을 위해 만든 세속적 칸타타에 속한다.
커피 칸타타의 줄거리는 이렇다.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아버지가 커피를 좋아하는 젊은 딸을 못마땅해 하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개방적이고 활달한 딸은 하루에 세 번씩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며 커피가 키스보다 달콤하고 와인보다 부드러우며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커피를 끊지 않으면 시집도 안 보내고 산책도 안 시키고 예쁜 옷도 안 사준다고 협박하지만, 딸은 콧방귀도 뀌지 않다가 결국 결혼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조건은 커피를 마시게 해주는 남편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쥐 잡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처녀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다며 엄마도 할머니도 커피를 마시는데 그 누가 딸에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며 끝을 맺는다.
필자에게 바흐처럼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수박 칸타타’를 만들고 싶다. 수박이 달달하여 당지수가 높다며 꺼리는 사람들에게 탄수화물이 적어서 당부하지수는 낮으니 염려 말고, 온갖 영양소가 풍부한 붉은 옷의 천사를 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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