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병역명문가)
진갑규

국방의 의무인 병역을  명예롭게 이행한 가문을 찾아 존경을 보내고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병무청에서 주관하는 사업인 병역명문가 선양사업은 단순한 국군홍보용 사업이 아니다.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켜야 될 국토의 소중함과 나라사랑을 일깨우는 국익과 직결되는 사업이다.

우리 가문은 2014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되어 병무청장상과 특별상을 수상한 가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상을 받기 위해 군에 입대하고 복무한 것은 아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하신 선친(1대: 진병성)을 비롯하여 나 또한 월남전에 참전하였으며, 두 아들 역시(3대: 보승, 효승) 모두 자이툰 부대와 오쉬노 부대에 해외 파병 복무를 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참전용사 1대인 아버님(진병성)의 경우, 고향은 낙동강 방어선이 쳐진 곳이었으며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밤과 낮의 지배가 바뀌는 상황인 당시에 지역 경찰로 공비토벌작전에 참전 중 큰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오셨다. 그때부터 밤만 되면 공비들이 집에 진을 치고 앉아 온갖 협박으로 회유했고 그 당시 4살이었던 나에게도 총을 대면서 뭔가를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자 아버님은 채 완쾌되지도 않은 몸으로 군에 입대하셨고, 그 후 6사단에 배속 받아 참전 중 부상으로 오른쪽 엄지 검지 발가락이 없으셨는데도 6.25전쟁 종전 후 만기로 전역 후 1982년 돌아가실 때까지 미 8군 군무원으로 재직하셨으며,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면 다리 통증으로 많이 힘들어하시던 모습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런 아버님을 모시고 자란 나는 1971년 월남 파병을 자원하여 맹호부대 1연대 3대대 11중대로 파병되었다. 중대 근거지가 월남중부 카손 계곡입구로, 프랑스군 1개연대가 전멸한 곳이며 최고의 취약지역이었다. 매복 정찰 작전이 하루도 쉼없이 반복됨은 물론 피아교전이 아주 빈번했다.
60mm 포탄에 맞아 부상당하고 동굴 탐색 중에 소이탄 폭발로 머리에 입은 화상의 흉터가 아직도 그대로이며 옆구리에 총탄 자국을 안고 있지만, 6.25와 같은 전쟁의 참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군인의 길을 천직으로 선택한 큰아들(진보승)은 현재 분단 상황에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위기에서도 대처 할 수 있도록 그동안의 체험과 경험을 통해 지휘관으로서 국가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상의해와 이라크 파병(자이툰부대 4진)을 격려했다. 초기 아프칸 파병(오쉬노부대 2진,과 3진) 시에는 그 당시 초등학교 1,2학년인 손자들 때문에 나는 큰아들의 아프간 파병을 반대했지만, 큰아들은 묵묵히 파병에 응해 1년 동안 근무했다.
둘째 아들(진효승)은 1군수 지원사에 근무할 때 이라크 파병을 자원, 선발되어 이라크 자이툰 부대 2진으로 6개월간 근무 후 만기 제대해 가문 3대가 특이하게도 모두 참전 경력을 갖게 되었다.
젊은 시절인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직장업무로 분쟁 중이던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와 동남아시아의 몇 개국에 상주했을 때 국력이 다져지지 못한 국가로 인해 고통 받는 국민들을 많이 보며, 든든한 국가 안에서 보호받는 국민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한 국방의 의무는 국민으로서 절대적으로 지켜야하는 의무이며 책임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정신을 우리 후세들에게 심어주고 제대로 가르친다면 우리의 소원인 통일의 날도 빨리 올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의 의지를 모아 병역의 의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군복무를 이행하는 사회기풍이 조성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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