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국시각장애인협회 동작지회장 조 승 현

따듯한 이불 속이 그리운 10월의 새벽이다. 앞 못 보는 눈먼 놈이 왜 집을 떠나 이렇게 10월의 밤이 새도록 개 떨듯 달달 떠는지 알 수 없다.
노을이 지기 전까지 햇볕이 내려쪼여 땀이 질질 흐르더니 10월의 새벽은 왜 이다지도 춥단 말인가. 텐트 없이 길바닥에 야영을 하자니 안개조차 막아 주지 못했다. 빼꼼히 얼굴을 침낭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스프레이로 물이라도 뿌리는 것 같이 얼굴이 축축하게 젖는다. 자욱한 안개가 비밀스러운 태고의 시간을 드러내면서 그 속으로 빠지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른 새벽잠에서 깨고 보니 배가 슬슬 고파지면서 따끈한 커피도 생각나고 뜨끈한 콩나물국도 먹고 싶다. 파일럿은 이런 내 맘을 싹 무시하고 빨리 일어나서 배낭에 침낭 챙기고 출발하자고 재촉한다. 그리고 달랑 인절미 한 팩과 물 한 병을 건네준다.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게 아침이다. 내 나이 이미 70살 넘어 71살인데 효 사상이 하나도 없는 거 아니냐 말이다. 자전거 타고 싶은 욕심에 앞자리에서 핸들 잡아달라고 파일럿 해 달라고 조를 땐 조를 때고 기왕에 떠난 길, 배는 고프지 않아야 하잖느냐 이거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야 사이클 타기 좋다고 달랑 침낭 하나 배낭에 넣고 왔다. 다른 먹거리가 있을 리 없다. 섭섭하지만 별수가 없겠다. 그거라도 안 먹으면 달리지 못한다. 페달을 열심히 밟으려면 꾸역꾸역 입에 넣고 씹어야 한다. 사이클 여행길, 10월의 금강은 가장 멋지고 아름답다고 했지. 그런데도 지금 배고픈 고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자전거길 유혹에 빠진 게 죄라면 죄가 되겠다.

사실 시각장애인인 내가 바람을 가르고 1박 2일의 사이클 여행길의 유혹은 가슴을 부풀게 하기 충분했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행촌 교차로를 출발하여 괴산군 칠성면 오천자전거길,충청북도 증평군, 청주시 무심천, 대청댐,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까지 제1코스. 여기서 1박이었다.

그런데 노숙지인 부여 근교 야영지 새벽은 안개가 대단하다. 휘감기는 안개에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단다. 노숙하면서 밤새 자는지 마는지 달달 떨던 몸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선뜻 나서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금강변의 철새들을 상상하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안개는 여전히 온몸을 적시지만 보이느니 갈대숲과 물빛이란다. 그리고 자전거 달리는 소리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 새들, 새들. 앞에 탄 파일럿이 페달을 밟으면서 말하는 데 산자락에서 강변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가릴 만큼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게  장관이라고 한다.

어느새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고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살살 넓적다리가 후들댄다. 갈 길은 멀고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다. 이런 나를 하늘이 돕는지 펑크가 났다. 파일럿이 사이클을 세우고 펑크를 때우는 사이에 좀 쉴 수 있어서 좋았다. 달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펑크가 4번이나 났다. 그때마다 파일럿은 잽싸게 펑크 난 곳을 때우고 출발했다. 참 펑크 때우는 재주도 귀신같다. 천천히 펑크를 때우면 좀 더 쉴 수 있는데 아쉽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행촌 교차로를 출발해서 충청남도 공주시까지 강줄기 따라 자전거 길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동안에 또 배고파진다. 그런데 또 인절미하고 물을 준다. 이 사람 혹시 전생에 인절미하고 원수진 일이라도 있는 거 아냐. 잠시 쉬고 다시 페달을 돌렸다. 사실은 쉬는 게 아니고 먹는 시간일 뿐이다. 여하간 기운 차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야 한다.

구름이 낮게 깔린 공주 근처 산자락은 산수유에 한 장면 같단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삼천궁녀가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 뛰어내렸다는 금강 하구이자 백마강이고 우리가 노숙할 야영지가 있는 부여란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삼천궁녀를 만나러 가 봐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피쉬식 피쉬식 바퀴가 도는 대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사이클이 비틀비틀 술 취한 것처럼 흔들린다.
이번에는 아예 타이어 자체가 무언가에 찍혀서 파스가 났다. 파일럿에게는 미안하지만 좀 쉴 수 있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 이얏호 환성을 질렀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사정하고 어딘가 든지 가서 타이어와 튜브를 사와야 할 것이고 그 시간에 나는 사이클을 지킨다는 핑계로 룰루랄라 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술도 참 좋다. 쓱싹쓱싹 하더니 후딱 임시 조치를 하는데 10분도 안 걸렸다. 그래도 10분이라도 쉬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파일럿은 공주 시내로 가면 자전거 수리하는 곳이 있을 거라며 계획에도 없는 시내로 들어섰다.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우고 우리는 또 달렸다. 이젠 정말 죽을 만큼 힘이 든다. 출발지 행촌 교차로부터 부여까지 자전거 길은 총 154킬로미터란다. 그런데 다시 공주로 뒤돌아서서 타이어 갈아 끼우는 바람에 약 40킬로미터는 더 달린 거 같다.

힘들어 죽겠다. 그냥 길바닥에 눕고 싶다. 이런 내 맘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해 떨어지기 전에 가서 노숙해야한다며 또 헉헉대며 부여 백제보까지 달려야했다. 노후된 엔진 같은 늙은 육신이 숨이 차고 가슴이 터질 거 같다. 발가락에 피가 안 통하는지 저려온다. 허벅지도 아프다. 종아리마저 아프다. 그냥 이대로 쓰러지고 싶다.
그러나 그건 참을만하다. 안장을 새로 바꾸었는데 이게 문제가 될 줄이야. 아이고 엉덩이 아파라, 내일 군산까지 달려야 하는데 안장통이라니 이거 큰일 났다. 사이클이 튈 때마다 거기가 아파 죽을 거 같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항문 바로 앞이고 양쪽 볼기짝 안쪽이다. 페달은 밟아야하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 온몸이 여름 뙤약볕에 파김치처럼 흐늘거린다. 아니다. 어떤 모진 놈에게 허벌나게 두들겨 맞은 것 같다.
겨우겨우 백제보 야영지에 도착해서 사이클을 세우자마자 사이클 슈트 속으로 손을 넣어 아픈 엉덩이를 살그머니 만져보았다. 끈적이는 게 만져진다. 더럽게 쓰리고 아프다. 피부가 벗겨진 게 틀림없다. 또 그 지긋지긋한 인절미 몇 개 집어먹고 물마시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내 다시는 인절미 안 먹을 거다.

방금 잠이 든 것 같은데 새들이 시끄럽게 합창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이다. 물안개가 신비롭게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하긴 금강도 강변이니 만큼 안개가 피어오르는 건 당연하겠다. 이제 겨우 새벽 5시. 여전히 거기가 아프다. 살그머니 만져 보았다. 아고고, 손도 못 댈 정도로 아파 죽겠다.

군산까지 가는 자전거 길은 왜 그렇게 탁탁 튀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이클이 튈 때마다 이건 고문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더, 이러면서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금강 철새도래지란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군산이란다. 최근 들어 무리한 개발로 철새가 찾아오지 않거나 개체수가 현저히 줄었다고 하는데 4대강 개발 덕분에 금강 자전거길을 신나게 달리지만, 철새들 서식지를 파괴했다는 자책감을 피할 수는 없다.
적막하고 자욱한 안개 속이지만, 시야가 확 트인단다. 가을에는 무안들녘의 황금물결과 강변 갈꽃의 은색물결, 그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금강이 어우러지는 꿈의 라이딩 구간이라고 앞에 탄 파일럿이 열심히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거다. 엉덩이가 아파 죽겠는데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군산이라더니 그놈의 군산은 왜 이렇게 멀리 있는지 아 정말 아파 죽겠다. 지옥이 따로 없다 여기가 지옥이고 지금이 지옥 아닌가. 쓰리고 아픈 걸 조금이라도 견디겠다고 요리조리 엉덩이 틀어보았자 좁은 안장 위에서 아픈 게 나아질 리는 없다.

그러는 사이에 언제 군산 시내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사이클 탈 생각이 없다. 아프기도 하고 배가 무지하게 고프다. 마침 참게탕 파는 집을 만났다. 썩 들어서서 참게탕 한 그릇 후딱 먹어치웠다. 환상적인 꿀맛이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없을 거 같다. 군산 터미널에서 3시 30분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알코올로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는데 정말 죽을 만큼 아프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줄이야. 다시는 사이클 안타겠다고 툴툴거리더니 내년 봄에 포항에서 동해안 따라 속초까지 라이딩하자고 파일럿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파도소리를 들으며 동해안을 씽씽 달리는 그림이 그려진다. 아, 빨리 엉덩이가 나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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