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3동 황 성 국

국립서울현충원 장병 제2묘역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묘 앞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말 붙이기가 조심스러웠지만 인사를 했다.
“고인과 어떤 관계입니까?”
“내 동생이요.”
이 말을 시작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이미 소주 한 병을 비우셨기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누구에게 말 못할 안타까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분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러하였다.
현재 85세이며 서울에서 살았다. 여동생 둘과 막내 남동생이 있었다. 막내가 월남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못 가게 하려고 당시 거금인 1,500만원을 마련해서 어머니와 같이 강원도 부대로 면회를 갔다.
어머니가 지휘관에게 천만 원을 줄 테니 월남 못 가게 빼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이미 인원이 확정되어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동생이 무슨 이유로 월남전에 지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은 면회 온 어머니와 형님, 형수 앞에서“‘살아서 돌아오면 배를 타고 오고, 죽어서 돌아오면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말을 하고 씩씩하게 어머니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떠났다.
그것이 동생을 마지막 본 것이다. 제대 2개월을 앞두고 동사무소로부터 사망통지서를 받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보고 싶은지 동생 사진을 어루만져서 사진이 다 달았다고 한다.
동생의 마지막 말처럼 시신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국립묘지 이곳에 안장을 했다. 어느날 낯선 여자가 동생의 묘 앞에 꽃을 놓고, 절하고 울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는 여자를 붙잡고 영문을 물었다. 알고 보니 동생과 사귀던 여자였다. 배가 불러 임신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유족연금으로 매달 80만원이 나왔다. 연금을 줄 테니 이 돈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더 할 말이 없다고 하고 가버렸다. 그 뒤로는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생은 1969년 10월 16일 전사했다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동생의 핏줄이라도 있었다면 …” 하면서 아쉬워했다. 그 아이를 낳았다면 올해 50세가 되었을 것이다. 어르신은 “내가 죽고 나면 이곳에 누가 찾아오겠느냐”고 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약 44만평에 18만1천여분이 잠들어 계신다고 한다. 한 분 한 분마다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6월을 맞이하면서 우리 동작구에 있는 현충원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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