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무지개처럼 찬란한데, 머릿속에는 ‘구덩이’라는 낱말이 계속 맴돈다. 엊그제 읽은 ‘구덩이 메우기’라는 기사 글이 마음의 종을 둥~ 쳐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다.
기자는 휴학 시절 보습 학원 강사를 할 때 지겹도록 반복되던 패턴의 날들 속에서, 강사들에게 주어지던 김밥 한 줄을 통해 저녁 한 끼의 고민으로 출발해 삶 자체를 성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미국 작가 루이스 새커가 쓴 ‘구덩이’의 주인공 스탠리 옐네츠가 어떻게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지 소개한다.
그는 10대 소년으로 100년 전 고조부가 죄를 지어 가문에 저주가 내려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우연히 도둑으로 몰려 18개월 동안 소년원 대신 초록호수캠프에 입소하게 되는데,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구덩이를 파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검은 의도가 있는 곳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날마다 사방 1.5m의 구덩이를 파는 힘든 날들, 스탠리는 그곳에서 만난 제로라는 친구와 함께 사막으로 도망친다. 생존을 위해 그곳에서도 구덩이를 파야 했지만, 이유와 의미가 있었기에 가슴 벅찬 기쁨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기자는 그가 파내려간 구덩이는 결국 자신을 채우는 희망의 구덩이었다고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보고 성경 속 인물 요셉이 떠올랐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어렵게 낳은 아들이 요셉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그것에게 절하는 꿈을 자랑함으로써 형들의 시기 질투을 받아 들판의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뻔 했다가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다.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다가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이집트의 총리에 오른다. 그리고 오랜 가뭄으로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구하게 됨으로써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요셉에게 구덩이는 어떤 곳이었을까? 귀한 옷을 입던 자신이 왜 그곳에 떨어졌는지, 자랑했던 꿈이 어떻게 이뤄질지, 두려움 가운데 묻고 또 묻는 사색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며칠 전, 지인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전하자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이라는 시를 보내왔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20여년 감옥생활을 인간학과 사회학, 역사학을 깊이 성찰하는 대학으로 삼고 그 사색을 작은 엽서에 빽빽한 기록으로 남긴 그분의 삶을 되새기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추운 겨울 독방에서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힘은 신문지만한 크기의 햇볕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 특별한 고난을 이겨낸 큰 스승의 인터뷰 말씀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스런 삶이 주어졌을까? 혹여 타락한 천사들이 지구별로 보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왜 이곳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분명히 안다면, 존재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어떤 일에도 감사하며 지낼 수 있으리라.
지금 우리는 3년째 코로나라는 구덩이에 빠져 있지만, 저마다 다른 빛깔의 사색으로 아름다운 날들을 빚어가고 있다.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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