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시간이 가장 긴 하지를 지나 여름의 한 가운데로 점점 미끄러져간다. 오랜 비의 눅눅함을 견뎌야 하는 장마이기도 하다. 마음 뿐 아니라 물리적인 준비도 단단히 하게 된다.
필자가 사는 빌라는 지어진 지 10여 년 되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생기고 있다. 특히 옥상과 뒤꼍의 방수 작업은 꼭 필요한 상태라 작년에 전체 8세대가 회의를 통해 공사를 결정하고 자금을 수합했다.
그런데, 해를 넘겨 5월이 다가도록 공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나부터도 ‘누군가 알아서 추진해주겠지’ 하며 소식을 기다려만 왔었다. 발등에 불 떨어져서야 하는 숙제처럼,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맘먹고 두레박으로 주인의식을 길어 올리자 물꼬가 트여 신속하게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업체에 맡기지 않고 위층 아저씨가 나서서 직접 페인트칠을 하기로 했다. 처음 해본 일이라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의사소통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지 못한 채 공사를 시작했다. 웬 걸... 사전 작업으로 뒤꼍의 들뜨거나 부패된 페인트를 제거하는데 하루, 그리고 세 번의 페인트칠을 매일 몇 시간씩 작업하면서 3일, 공사 폐기물 처리 및 보수작업에 2일, 자그마치 6일간의 장정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작업반장 역할을 한 위층 아저씨는 이게 취미생활이라고 농담도 하면서 느긋하게 일을 하는 고수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반면 번갈아가며 옆에서 돕는 이들이 오히려 헉헉거렸고 필자와 누구는 두 번 다시 못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공사를 함께 하며 땀을 흘리다 보니 가족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지만 각자의 개성이 부딪혀서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갈등은 모난 부분을 둥글둥글하게 만들어 주는 연장과 같고, 마음 그릇을 넓혀주는 하늘의 선물이라고나 할까?
큰 일 마침을 자축하는 의미와 빌라 운영회칙을 마련하기 위해 전체모임을 가졌다. 초록으로 깨끗하게 단장된 탁 트인 옥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공통의 문제를 나누고 소통하니 ‘이런 게 바로 빌라공동체 생활이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한솥밥은 아니어도 한대문을 쓰는 이들과 함께 상의하고 협력하는 이 멋진 일을 서울살이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해 본 것이다!
게시판을 새롭게 가꾸고 회의 내용들을 정리하여 공유했다. 회비의 수입과 지출 세부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함께 지켜야 할 약속들을 공지하며 협조를 구했다. 빌라 청소도 작년 3월부터 우리가 직접 돌아가며 하고 있는데 그동안 월별로 하던 것을 주별로 하기로 했다. 게시판에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웃도 생겨 더욱 생기가 돌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활동이 줄어든 요즘은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기 마련이다. 자칫 불편과 상처를 주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이웃끼리 거리를 멀리 두고 형식적으로 지내면 편한 것도 있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과 장점들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창조의 기쁨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의 집에는 “당신이 있어 마을이 행복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작은 휴지케이스가 거울 위에 놓여 있다. 디자인이 예쁠뿐더러 문구는 더더욱 좋아서이다. 지치고 피곤할 때 청량제 같은 사람을 5분이라도 만난다면? 상상만 해도 기운이 샘솟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올봄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따뜻한 편지와 함께 음료수를 선물해왔다. 집 내부공사를 할 예정인데 소음을 좀 이해해달라는 부탁의 메시지였다. 정성스레 적은 손편지를 보는 순간  ‘좋은 이웃이 되겠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오며 눈시울이 살짝 젖어 들었다.
눈을 씻고 보면 곳곳에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숨어 있다. 동네 약국에서 모기살충제를 사며 “재난지원금카드 사용되나요?”하고 묻자 “그럼요~ 모기도 재난이여~”하는 말에 웃음이 빵 터졌다. 떡집에서 식혜를 살 때는 “50대 중반인데 임플란트를 4년간 11개나 했어요~”하고 자랑하듯 환하게 웃으며 말해 “우와~!”하며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작은 것까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이웃, 힘든 일 앞에서 선뜻 발 벗고 나서주는 이웃, 잘 웃어주고 박수쳐주는 이웃, 여유 있는 유머로 마음의 지경을 넓혀주는 이웃이 있어 오늘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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