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엔 벌써 봄이 왔다. 보통 4월 말경에야 피는 영산홍에 꽃이 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산홍은 진달래나 철쭉처럼 낙엽관목이 아니라 상록관목이라서 겨울에도 초록 잎이 지지 않아 싱그러움을 더해주어 좋았다.
1월 중순에 처음으로 분홍색 꽃망울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이 두근거리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후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꽃을 살피러 가는 게 일이었다. 어린 시절 가을 아침마다 우리 집 밤나무 열매가 배추밭에 떨어진 것을 누가 주워갈까 싶어 부지런히 일어나 이리저리 알밤을 찾아 헤매던 때가 떠올랐다.
꽃이든 열매든 거쳐야 할 과정들을 충실히 지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꽃도 열매도 열릴 것 같지 않지만 가능성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이고 땀을 흘린 후에야 얻는 결실은 더욱 값진 법이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생명과학자 카탈린 카리코를 생각해본다. 그녀는 거의 40년을 mRNA 연구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불가능한 일이라며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온갖 고난에도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발전시켜 왔는데,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효과 높은 mRNA 백신 개발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mRNA는 단백질의 설계도와 같은 DNA 정보를 리보솜에 전달해 단백질을 생성하게 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에 ‘생명체의 소프트웨어’로 불린다고 한다. 1961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과학자들이 처음 발견했고, 그녀는 1976년 헝가리의 세게드 대학교에서 생명과학 강의를 듣다가 알게 되었다. 이 연구에 매료되면서 실험실안의 mRNA를 의학계에 활용할 수 있다면 온갖 면역질환과 암세포를 극복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안고 공산국가인 헝가리를 어렵게 떠나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초청한 대학에서 연구 성과가 몇 년 동안 나오지 않자 본국으로 추방하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하고, 연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연봉과 직책을 포기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연구를 포기할 수 없어 연구보조 기술자보다 못한 매우 낮은 임금을 받으며 연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암에 걸려 두 번의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꼭 필요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던 그녀 자신의 삶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전적으로 그녀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남편과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연구자금을 대주며 함께했던 공동연구자 와이스만 박사가 있었기에 mRNA 백신이라는 결실이 가능했을 것이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카탈린 카리코의 삶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비록 고통의 보자기에 감싸있을지라도 그 너머의 가치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일에 하늘이 감동할 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는 단번에 Yes!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잃었던 건강을 되찾아가며 나름 노력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열 두 고개 중에서 무사히 한 고개를 넘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는 동화 속 대사가 “마스크 하면 안 잡아먹지”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모쪼록 백신 접종이 체계적으로 잘 진행되고 세상이 주는 선물, 평범한 일상과 여행의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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