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린 봄 마중 비가 개구리와 벌레들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촉촉하게 적셨다. 산천초목이 겨울잠을 깬다는 경칩이 코앞이다.
엊그제는 필배씨가 다니는 러블리(Lovely) 미용실에 함께 갔다. 남편이 헤어컷을 하는 동안, 남자 원장에게 머리 관리법 코치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한결 젊어 보이는 남편에게 엄지척을 하며 “음~! 아주 멋진데요! 새 신랑 같아요~” 하자, 남편은 “고마워요!” 하며 활짝 웃었다. 이는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우리에겐 결혼 20여년 만에 이뤄진 실로 감격스런 장면이다.
필배씨는 어린 시절에 친할머니께 무척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부심이 뿜뿜 넘치고 무의식중에 할머니께서 주셨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사랑을 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 무조건 맞추고 사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커서 반드시 남녀 평등한 삶을 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탄탄한 경제활동을 꼭 해야만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결혼해서 맞벌이를 하게 되었고, 당연히 남자도 가사와 양육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배씨는 ‘남자는 바깥 일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사고의 남자였다. 이후 삶의 무게가 커져갈수록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고, 대화는 오히려 관계를 더욱 헝클어지게 했다.
남녀관계의 핵심은 서로의 무의식을 견딜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결혼 전에 매력으로 끌렸던 서로의 다른 점이 결혼 후에는 발등을 찍는 단점으로 드러나고 서로를 아프게 한다. 그때가 바로 무의식의 첨예한 대립을 겪는 시기이다. 
10년 넘게 오랫동안 험난한 무의식의 강을 건너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자아’라는 돌덩이를 내려놓게 되었고 우리 부부에게 서서히 평화의 시간들이 찾아왔다. 빵 한 조각 빼앗기지 않으려 식탁에서 잽싸게 도망치던 남편의 장난기도 돌아와 배꼽잡고 웃기도 했다.
노후의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꿈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강원도 횡성의 소담한 산골마을에 살고 있는 89세 소녀감성 할머니와 98세 로맨티스트 할아버지의 노년의 사랑과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76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변함없이 함께 다니고 장난치고 웃으며 예쁜 한복을 커플복으로 입는다. 꽃을 귀에 꽂아주기도 하고, 겨울엔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한다.
알콩달콩 살아가던 부부지만 어느덧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려 하고, 할머니는 석 달만 더 살아달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외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 강을 만나기 전에, 먼저 무의식의 강을 잘 건너야 할 것 같다. 이성이라는 복잡한 의식의 세계에서 감지하기도 전에,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감정들이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의 중요성과 잘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무의식에 답이 있다』는 책이 있는가보다.
서로 경어를 쓰는 부부는 다툼이 덜하다고 한다. 그나마 우리도 경어를 써왔기에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힘들더라도 무의식의 강을 잘 건너면, 모소 대나무의 뿌리들이 단단히 연결되어 어떤 비바람도 견디는 것처럼 관계가 튼튼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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