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은 일생토록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음악과 더불어 지냈기에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산이 남긴 작품은 매우 많은데, 특히 불후의 시조들을 남겼습니다. 조선의 문학에서 장가, 즉 긴 문장은 송강 정철이요, 단가, 즉 짧은 문장은 고산이 제일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산의 시조를 보면 자연 속에서 안락과 평화를 느꼈던 것으로 생각되고, 정치무대에서의 비인간적인 투쟁과 욕망 등으로부터 자연에로 해방된 속 시원함을 즐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 생활을 노래한 연시조입니다. 고산이 65세 때(1651년)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10수씩 40수로 되었고,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전해옵니다. 그리고 오우가(五友歌)는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을 노래한 시입니다. 물의 맑음과 끊임없는 흐름, 바위의 변치 않음, 소나무의 늘 푸르름과 뿌리 곧음, 대나무의 곧음, 달의 보고도 말 아니함 등을 신의, 절개, 기개, 관용, 침묵 등의 인간의 미덕과 연결한 것이죠. 이 두 작품은 고산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연시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산은 남달리 깊은 시심(詩心)을 가진 데다 음악을 사랑했고 조예가 깊었던 풍류인이었습니다. 특히 가야금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 두었는데, 당시 거문고의 명수인 권해(權海)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감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곡과 연주도 했습니다. 고산에게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던 것이죠. 고산은 가무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게 즐겁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고산의 글에 보면 “<예기(禮記)>에는 ‘13살에 음악을 배운다’ 했고, <소학(小學)>의 제사(題辭)에는 ‘읊조리며 노래하고 춤춘다’ 했고, 정이천(程伊川) 선생도 또한 ‘가르치기를 가무로써 하면 어린애들이 배운다’ 했으니, 모두 옛 성인들의 음악에 담긴 그 속뜻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에야 음악을 할 수 있다면 성인이 어찌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이르겠습니까”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언급을 보면 고산이 음악을 하는 이유에는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동양의 유교적 예술철학인 <예기, 악기(禮記, 樂記)>의 예악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가, 무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산에게 있어서 노랫소리와 춤의 자태는 시와 서로 같은 것이었으며, 그것은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죠. 이는 “하루도 즐겁게 놀지 않으면 심성을 수양하며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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