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전 동작구청장, 국가원로회의 위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6)”는 말은 널리 알려진 성경구절이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아옹다옹 다투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고 마음 편한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웃이 이에 대해서 백퍼센트 보답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옆에 있는 동료가 라이벌로서 틈만 있으면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기가 성행하고 있는 요즈음은 그럴 확률이 더 높다. 따라서 이웃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마음에 비수를 품고 접촉해야 한다. 이웃이 언제 어느 때 잠들어 있는 여러분의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일이다.
“사자의 몸 안에 있는 벌레”란 말과 같이 최대의 적은 강력한 외부의 누구가 아니라 가까운 동료 또는 이웃일 경우가 허다하다. 배반당하고 걷어 채여 쓰러진 후에 “빌어먹을, 그렇듯 잘 봐 줬는데 그 얼마나 비열한 놈인가.”하며 우는소리를 해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패배자의 비애를 맛보기 전에 상대방의 배반을 사전에 알아차리는 정보능력, 싸움에 돌입했을 때 역습으로 나설만한 기력, 상대방의 공격을 몇 배의 힘으로 때려눕힐 만한 힘을 비축해야 한다. 따라서 이웃에 대해서도 결코 마음을 놓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오히려 먼저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매장시키겠다는 각오로 접촉해 나가야 한다. 그것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면서 친한 것처럼 하면서 때려눕힐 기회를 노려야 한다. 평상시부터 적의를 들어내서는 상대방도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가 선제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서시대의 유대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 군에 의한 힘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철저하게 수탈이 행해지고 있었다. 지배자 쪽은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민들은 빈궁의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로마 군에게 힘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체념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 말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적 배경을 돌아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결합해서 피차 도와 가는 것이 살아가기에 용이하다. 이러한 사상은 지금도 노동조합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예수님은 싸움을 피해 가는 길을 택했다. 섣불리 저항하는 것보다는 약한 자끼리 단결하여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라고 권유한다. 그것은 얼룩말이 초원에 어울려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얼룩말이 사자와 같은 강적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기술은 재빨리 도망치거나 동료들과 모여서 원형의 진을 만들어 오직 뒷발로 계속 차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의 비정한 섭리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딱하고 불쌍한 광경인가.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가 만일 예수님이 설파한 이웃사랑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라면 사랑의 십자가를 의심 없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아니 전혀 그렇지 못하다.
위기 상황은 점점 약육강식의 시대로 압축되어 가고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 따위는 도대체가 존재할 수 없는 절박함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모든 힘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 쏟아도 모자랄 지경에 이르고 있다.
혹자는 21세기는 각자가 살기 위한 투쟁을 극렬하게 전개할 것이기 때문에 지옥적 상태(like a hell on earth)가 연출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점을 자각하여 내 몸을 어떻게 운신해야 될 것인가를 모질게 마음먹어 닥쳐 올 위기의 물결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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